아직도 넘치는 이 소리 없는 격랑이!
박규리
덧없을 이 계절도 제 푸르름에 겨워 뜨거워지는 속살을 어쩔 줄 몰라 뒤척이는 여름입니다.
일찍 저녁을 들고 방문 앞에 앉았습니다. 지나던 모시바람 한 줄기에 열이레 달 모서리는 베인 듯 접혔는데 달빛 사이로 온종일 목 쉰 뻐꾸기는 뻐꾹뻐꾹 울어만 댑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묵언 중입니다. 산중에 살면서 따로 묵언할 일이 있겠냐 하시겠지만, 말이 귀한 이 곳에서야말로 말의 소중함과 무서움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도대체 말이란 무엇일까요?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서로를 알 수 있고 가까워질 수 있겠습니까. 말을 통해서만이 오해를 피하고 싸움을 막을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말로 전할 수 있는 진실이 세상에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슬픈 마음이 듭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밤새 마주 앉아 이야기해도 정작 가슴 저린 외로움의 근원은 서로 어루만지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제가 살아온 삶이란 누군가에게 말을 함으로써 상처를 주고, 그 상처로 인해 제가 괴로워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더 많이 말할수록 진심과는 점점 어긋나고, 도리어 소중한 사람과 멀어지게 될 뿐이었습니다. 서로의 아픔을 위로받고 이해받고 사랑받고픈 사람들끼리, 한 그루 외로운 나무 같은 사람들 끼리 아! 유일하게 소통될 수 있다고 믿은 말 때문에 왜 더 외로워져야만 하는 건가요. 용서와 사랑의 말 대신, 왜 모든 싸움과 이별은 말로부터 시작되는 걸까요.
겨우 며칠 입을 닫아봅니다. 밖의 말을 거두면 마음 밖으로 파도치던 격랑도 조금씩 스러져 제 안으로 가만가만 흘러드는 것을 느낍니다. 말을 멈추면 이상하게도 몸이 환하게 열립니다. 모호하던 사물도 새롭게 다가오고,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람의 감정도 더욱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 주었던 모든 말들이 사실은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한 이유였다는 걸 눈물겹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침묵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참말인 것 같습니다. 잠시 나의 말을 거두는 일이 내 영혼에 작은 등불을 켜는 일이란 걸 다시는 잊지 말자고 다짐해 봅니다. 그러나 새벽마다 넘치는 이 소리 없는 격랑이 아직도 그대를 얼마나 가슴 아프게 하는지요.